3. 제 2차 세계대전의 결과 및 특징
1.전쟁 피해
제 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를 전장으로 하여, 거의 모든 나라가 휘말린 전쟁이었다. 공식적인 통계로 보면, 동원된 병력이 약 1억1000만 명, 전사자가 약 2,500만 명, 민간인 희생자가 약 2,500만 명이며, 전상자가 3,5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최대 피해국은 소련으로 전사자 약 1,360만 명을 포함해 전 인구의 10%가 넘는 약 2,000만 명의 사망자가 났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 희생자가 유난히 많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스 독일의 인종론적 멸종정책 때문에 약 500만 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었으며, 러시아인들 또한 살해되었다. 그리고 독일인 식민(植民)을 위한 슬라브계 주민의 추방정책,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인력 징발 정책에 수반된 희생자도 있고, 빨치산을 포함한 저항운동의 희생자들 또한 적지 않았다. 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사망자 약 34만 명), 드레스덴 공습(45년 2월 13일, 사망자 약 23만 명)에서 볼 수 있듯이, 제 2차 세계대전은 비전투원(非戰鬪員)을 가리지 않는 대량살상 전쟁이었다.
2. 2차 세계대전의 특징
① 기술혁신(무기의 발달)
전쟁은 기술혁신을 통한 발전을 가져온다. 승리의 무기를 연구/개발하여 이기려고 서로 피나는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당시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싸울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연합군보다 무기개발에 있어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도 기술혁신은 현저히 발달하여 각국의 경제· 사회 구조를 변화시켰으며, 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중 개발경쟁의 으뜸은 원자폭탄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신기술의 개발은 미국과 같은 경제대국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것으로서, 거듭되는 개발에 의하여 미국은 기술력이나 경제력에서 영국을 능가했으며, 또 패전국인 독일의 로켓기술, 제트기관기술을 흡수하여 자본주의 세계에서 최대· 최강의 군사국가가 되었다.
② 세계정치의 구조변화
제 2차 세계대전은 세계정치의 구조적 요인을 크게 변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대전 전에는 국제적으로 고립하여, 독, 소전에서 조기에 붕괴할 것으로까지 예상되었던 소련은 연합국의 대독전쟁 승리에 절대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전후 세계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했다.
영국은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식민지의 독립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되면서 이전의 세계제국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 또한 식민제국(植民帝國)으로서의 부활을 꿈꿨으나 세력이 약화되었고 유독 미국만이 생산력을 발전시켜 최대· 최강의 자본주의 국가로서, 축소· 피폐한 자본주의 세계를 지도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체제를 더욱 약화시켜 혁명운동· 민족해방운동을 단련·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항일전쟁을 겪은 중국은 우여곡절 끝에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수립하였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퇴와 동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베트남 공화국이,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물론,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이 활발해졌고, 독립하는 나라가 잇따랐다.
③ 평화조약 :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 소를 양극으로 하는 두 체제의 대립이 격화한 ‘냉전(冷戰)’속에서 평화조약의 체결은 용이하지 않았다. 46년 7~10월의 파리 평화 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 문제를 둘러싸고 미· 소가 대립했는데,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다가 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됨으로써 해결되었다. 47년 2월 10일에는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또 다른 추축국인 독일에 대한 처리 방침은 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議定書)에 명시되었는데 그 해석을 둘러싸고 미· 소는 사사건건 대립하여 47년말의 런던 4개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다. 49년에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국· 영국· 프랑스는 52년 5월 서독과 ‘평화협정’조약을 체결하고, 54년 10월의 파리협정으로 서독의 주권을 회복시켜, 사실상의 단독당화를 맺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부여하고 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시켰다. 이리하여 2개의 독일은 90년 10월에 통일화 될 때 까지 각자의 다른 사상을 가지고 분단되었다.
그리고 대일처리(對日處理) 방침은 45년 7월 26일의‘포츠담 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강화 문제에서도 미· 소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았다. 한편 중국 상하이에 거점을 마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력에 의한 국권회복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력에 의한 국권회복에 실패하고‘카이로선언’대로 타력에 의해 광복을 맞이하였고 38도 선을 기준으로 남북분단의 비운을 맞아야 했다. 그 후에도 전 국토의 통일을 위한 우리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은 서로 사상을 달리하는 정부를 수립해야만 했다.
결론
제 2차 세계대전은 전사자가 약 2500만 명, 민간인 희생자도 약 4천만 명에 달했던 대량 학살 전쟁이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1944년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통해 일본인을 비롯한 조선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등 여러 나라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하였으며,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였다.
또한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15만 명을 살상했고(재일 조선인 포함),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의 공군은 드레스덴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의 피해는 극히 심하였다.
우리는 제 2차 세계대전을 떠올릴 때 히틀러와 일본의 야욕을 먼저 생각하게 되지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전쟁이란 소수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이해관계에서 비롯 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이해관계와 사회적 배경과 같은 많은 요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많은 나라가 독립하고 세계정치 구도가 재정비 되고 무기의 개발에 따른 핵무기와 같은 최첨단 기술이 발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류가 아니라 평화와 번영이 공존하면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인류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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