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이야기]제 2차 세계 대전의 역사 1부











서론


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규모로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가 휘말린 전쟁이며 역대 전쟁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낸 전쟁이다. 개전일 시각은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리는데, 통상적으로는 193991일 새벽 445분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련군이 1939918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하였다고 본다


다른 시각으로는 193777일 일본의 중화민국 침략, 19393월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막은 194557일 독일군이 서부연합군에, 8일 동부의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동년 86일과 89, 미국의 원자 폭탄 투하 이후 8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이 결과로 한국,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발생 배경과 크게 유럽/아프리카 전선, 아시아/태평양 전선, 소련의 태평양 전선으로 구분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경과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은 전쟁의 피해, 기술 혁신, 세계정세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생 배경과 발발


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당시 각 국의 경제적인 상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인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으며, 즉 자본주의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국내정책의 정돈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행동을 개시, 33년 만주국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다. 33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 곧 연맹을 탈퇴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국내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35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36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이탈리아는 3510월 에티오피아를 공격하였고 365월에는 전토를 정복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의 확대, 전쟁 위기를 앞에 두고 반()파시즘, 민주주의 옹호를 주장하는 민중의 반전(反戰)운동도 활발해져, 이것을 배경으로 35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는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창함에 따라 362월 에스파냐에,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에 인민전선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내란이 벌어졌고, 중국에서는 36년의 시안(西安)사건을 계기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자, 일본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37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3611월 독일, 일본은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고, 이듬해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은 반소(反蘇)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 받으려고 하였다.


37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38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合倂)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38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다.


소련은 독, 일의 연맹 탈퇴 후인 349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집단안전보장정책에 노력(리트비노프 외교)하게 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뮌헨 회담에서 제외된 것은 리트비노프 외교의 기초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에스파냐에서는 391월 독, 이가 원조하는 프랑코가 인민전선정부를 타도했다. 395월 소련 외상 V.M.몰로토프가 취임하여 무력외교로 자국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39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고 이어 폴란드 회랑(廻廊)과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하였다.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 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양국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하였다.



독일, 폴란드 간의 긴장 격화와 함께 영국은 대독개전(對獨開戰)에 대비하여 소련과 교섭을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독일과도 교섭하고 있었다. 뮌헨 회담 이래로 소련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불신은 숨길 수 없게 되었고, 8월에는 영, 소 교섭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독, 소 교섭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미 폴란드 공격을 결의하고 있던 히틀러는 동서에 걸치는 2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독일-폴란드 전쟁이 반소(反蘇)전쟁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823일의 독, 소 불가침조약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되었으며, 대소 침략을 겨냥한 일본의 대독 군사동맹교섭은 도각(倒閣)으로서 끝나 버렸다.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예정대로 3991일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9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宣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2. 제 2차 세계 대전의 경과


2차 세계대전은 교전지에 따라 크게 유럽/아프리카 전선 그리고 아시아/태평양 전선 이렇게 4가지로 나뉜다.


1. 유럽/아프리카 전선

소련과의 독· 소 불가침 조약으로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전격전의 입안으로 초기에 백색 작전, 황색 작전 등 의 여러 작전을 성공시켜, 폴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덴마크, 노르웨이, 북부 프랑스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 공격을 감행하려 했던 바다사자 작전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함으로써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후 독일은 동쪽으로 관심을 돌려 1941년 이탈리아가 점령하지 못한 그리스와 독일과의 동맹에 반대하는 정변이 발생한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 먼저 점령하고,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동맹국으로 삼았다. 그리고 1941622,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승승장구 하였으나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밀려 전멸하였고 코카서스로 진격했던 군대들도 후퇴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독일은 소련의 쿠르스크에 대한 총 공세를 감행했으나 19437, 쿠르스크 전투에서 다시 소련군에 패하면서 기울어 밀리기 시작했다.


19412월 히틀러는 리비아에서 패배 일보 직전에 처한 이탈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에르빈 로멜을 사령관으로 하는 독일군 부대를 아프리카로 파병하였다. 부족한 병력과 병참 지원에도 불구하고 로멜 장군과 북아프리카 군단(DAK)이 의외로 선전하였으나, 1943년 초 튀니지에서 항복하면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이후 연합군은 시실리 및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 본토로 연합군이 상륙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연합군에 항복한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독일은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시킨 뒤, 베니토 무솔리니를 복귀시킨 후, 사실상 점령군 행세를 하며 연합군을 맞아 싸웠다. 하지만 이 이탈리아 전선도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한편 독일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1942년부터 소위 대서양 방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수많은 외국 포로가 동원되었으며 프랑스로부터 네덜란드까지 연결되었다. 미군과 영국군은 1942년의 디에프 기습 공격에서 얻은 전훈을 참고하여 2차 세계대전에서 제일 유명한 작전 중의 하나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으로 연합군은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서부에서 전세의 재역전을 노렸으나, 양측에서 압박해 오는 동서 연합군을 막을 힘은 없었다. 51, 소련군에게 베를린을 점령당하고, 엘베 강의 토르가우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만나서 악수하는 와중에 194557일 서부 연합군에 항복하고, 58일에는 동부의 소련군에게 항복하였다.


2. 아시아 태평양 전선

일본은 애당초 국민당 정부의 중화민국과의 1937년에 시작되었던 중일 전쟁이 진행 중에 있었고 전쟁 기간 중에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는 등 아시아 전선이 진행 중에 있었다.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중화민국 정권을 지지해왔던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소위 ABCD 포위망을 구축하고 나아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와 철광의 수출 제한과 같은 무역제한을 발동하면서 일본을 고립시켰다. 그러자 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일본은 경제 위기를 우려하였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영국령 말레이 반도, 버마,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자원 산지들과 나아가 인도, 태평양의 섬들을 장악해 이 지역의 주도권을 일본을 중심으로 돌리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제창하였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미국의 경제 제재가 심화되자 결국 일본은 1941128, 미국 하와이 주의 미 해군 기지인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전쟁은 크게 확대되었고, 초반 기습의 효과를 누린 일본군은 홍콩, 동부 미얀마, 서부 뉴기니 섬, 필리핀, 동인도 제도 등 인도양의 대부분과 솔로몬 제도까지의 모든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하며 승승장구 하였다. 이렇게 초기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오스트레일리아령 동 뉴기니의 주요 항구인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해 오스트레일리아를 노렸으나 육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활약으로 패전하였고 해전에서도 산호해 해전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부대에 의해 둘리틀 공습(1942418)으로 주요 도시가 최초로 미국 공군의 공습을 받았고, 이런 사태로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부대의 격멸과 태평양에서의 재해권 완전 장악을 위해 미드웨이 섬에 대한 공세에 나섰지만 초기 작전의 실패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제해권과 제공권에 큰 공백을 갖게 되었다.


한편 미국은 남태평양의 섬들을 탈환하는 작전을 세우고 과달카날 섬을 시작으로 반격하였다. 이때의 일본은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에서 벌어진 육전 및 해전에서 연일 참패하였고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한 필리핀마저 상실하였으며 레이테 해전에서 해군 함정의 대다수를 상실하였다. 그 후 미얀마에서도 참패하였고 결국 사지에 몰린 일본은 한반도의 제주도와 일본 열도의 규슈, 오키나와 섬을 최후의 방어전장으로 설정하고 항전하려 했으나,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으로 방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45310일 도쿄 대공습으로 15만이 넘는 일본인이 목숨을 잃었다(재일 조선인 포함). 그리고 623일 수개월간 질긴 전투가 벌어지며 일본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오키나와가 미군에 점령되었으며, 86일에는 히로시마, 89일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는 참상(慘狀)을 겪어야 했으며, 88일 설상가상으로 그 동안 중립을 지켜온 소련이 만주의 관동군을 전멸시켰으며, 결국 일본은 연합군이 본토 상륙을 개시하기 전인 815일에 항복하였다.


3. 그 외 : 소련의 태평양 전선 참전

소련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지는 않았으며,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하였다. 또한 러일 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일본에 할양하였던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를 탈환하였다.


미국은 이 전쟁 중, 회담을 통해서 스탈린에게 태평양 전선에 참전하라고 독려하였고, 이는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인 희생자를 줄이면서 전쟁을 빨리 끝내려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략 때문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을 비롯한 중앙 유럽의 문제가 세계 대전으로 비화되는 두 차례의 경험을 통해, 독일을 고립시키고 소련과 연합하여 세계 질서를 유지해 나가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50년대 초 마녀 사냥식으로 공산주의자를 색출한 매카시 선풍이 미국을 휩쓸었을 때, 과거 루스벨트 대통령 밑에서 일했던 많은 관료가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 때 국무장관을 지낸 딘 애치슨도 조사 대상이 되었다.


외교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일본의 전권대사였던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가 194592일 미국 측의 맥아더 원수에 대해 요코하마 근해에 정박한 미 해군 군함 미주리 호의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완전히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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