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토착 세력의 항쟁
이 시기 토착민들의 크고 작은 항쟁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되는 항쟁은 바로 세포이의 반란이다. 세포이란 벵골전투 전부터 동인도회사에서 고용한 인도 용병들이다. 당시 인도에 파병되있던 영국군의 90%가 이들 세포이였다.
세포이들은 인도 사회에서도 높은 카스트 출신들이였다. 반란의 계기는 배경적으론 동인도회사의 고압적인 정책이 그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직접적인 계기는 인도 사회 특유의 카스트에 얽힌 불만이었다. 그 하나는 세포이의 해외파병 문제였다.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원정이나 해로를 따라 미얀마 쪽으로 나간다는 것은, 세포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나가는 것으로, 음식이나 물 등 모두가 악조건인 그런 세계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미지 침략정책상 미얀마와 아프가니스탄으로의 진출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세포이들이 불만을 갖자 영국은 1856년 7월에 ‘해외에 출정한다고 약속하지 않는자’는 세포이로 고용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해서 세포이의 불만은 소위 생사에 관한 해외파병 문제와 함께 점점 높아져만 갔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엔필드 총에 약포를 사용하는 문제였다. 1857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53년식 엔필드 소총을 새로이 세포이들에게 지급했다. 그런데 이 소총에 사용하는 기름이 소기름과 돼지 기름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도와 돼지를 피해야 하는 이슬람 교도에게 이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영국인들은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다고해 수습하려고햇으나 이미 영국인에 대한 믿음이 떨어질때도 떨어질때라 믿지않았고, 끝내 반란이 일어났다.
세포이의 대반란은 갠지스강 상류에있는 메루트 라는 도시에서 시작되게된다. 세포이들을 따라 농민들도 봉기를 일으키게되었다. 그 지역에서 영국군을 물리친 세포이와 농민으로 구성된 반란군들은 명목뿐이긴 하지만 살아있는 무굴제국의 황제 바 하두르 샤 2세가 있는 델리로 향했다. 델리에서 승리함에따라 점점 반란이 전국으로 펴지게 되엇고 갠트강 상·중류를 비롯해 중부인도까지의 지역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되었다.
4. 영국 동인도회사의 해산
영국의 지배가 끝낫듯 보였으나, 불행히도 반란군은 하나가 될수없었다. 흰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대립이나, 지방끼리의 반목 등 때문에 반란군 내에서도 분란이 일어났는데, 황제와 왕자는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뭉쳐야되는 사령관이 존재하지 못했다. 전국적 규모로 확대된 이 반란은 결국 1857년 재정비를 하고온 영국군에 의해 1859년 진압되었다. 이 반란의 책임이 동인도회사의 운영방식에 있다고 하여, 1858년에 인도통치법을 가결하여, 인도 각지 동인도회사의 통치권을 박탈하였다. 이것으로 1600년 발족한 동인도회사는 명맥이 끝어지게 되 엇다. 인도는 1858년 11월 1일부터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게되었다.
결론
인도에 진출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초기에는 상업적인 목적만을 가지고잇엇으나, 플라시전투와 북사르전투의 승리 이후 인도의 징세권을 간섭하기 시작하더니, 후엔 인도의 정치.경제 등 모든 것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동인도회사는 무력을 앞세운 상업 세력으로 큰 맹락에서는 서구 제국주의의 일환으로도 볼수잇으나, 국가 기관이 아닌 민간 회사가 이런일을 했다는것은 이상하다.
보통일경우에는 식민지 사업은 국가가 주도하였을텐데, 동인도회사는 회사가 사병을 고용하여 식민지사업을 했으며 그 나라의 징세권,정치를 간섭하였다. 보통은 식민지의 땅은 국가에게 주는것이 맞으나, 어렵게 전쟁을 치루고 이 지역의 징세권을 확보한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징세권을 국가에게 주지 않았다.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않았더라도 앞의 내용들을 보면 동인도회사가 해산되는것은 당연한 일인것같다.
참고 문헌
1. 아사다 미노루,『동인도회사』,파피에,2004
2. 이옥순,『인도현대사』,창비,2007
3. 신윤길,『영국 동인도회사 연구』,서원,1996
4. 하마우즈 데쓰오,『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영국 동인도회사』,심산문화,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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