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패망









전쟁 국가 일본의 탐욕! 태평양 전쟁


193777일에 노구교사건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은 6년 이상 계속되었고, 이는 태평양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일본은 근대화된 장비와 훈련으로 무장된 30만의 정규군과 만주인 및 몽고인 부대 15만과 예비군 200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중국군은 200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무장된 병력은 10만미만이였으며, 해군과 공군은 전무했다. 이러한 전력 차이로 일본은 상해를 점령하고, 1213일 남경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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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47일 중요한 교통의 중심자인 서주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8월 하순에는 한구를 점령하였지만 주요시설이 파괴되어 보급에 차질이 있었다. 1938년 말까지 중국의 중요 지역을 장악했지만 중국 내의 게릴라 활동, 주민의 적개심으로 더 이상 진척이 없었고, 미국이 중국을 지원하면서 1939년으로 오면서 경제적 봉쇄전술로 전환한다


미국은 일본을 억제하기 위해 1941년 미국 내 일본 재산을 동결시켰고 군수품의 대일 수출규제를 통해 압력을 가하고, 북부 프랑스령 인도지나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을 규탄하기 위해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는 ABCD 경제 봉쇄망을 구성했다. 전쟁 필수물자를 수입할 수 없었던 일본은 국수주의적 팽창야망을 포기하거나, 전쟁을 일으켜 남방 자원지대를 확보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서 후자를 택했다. 이런 일본을 직접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뿐이었는데 미국은 유럽전쟁에 무기를 대여하고 있었으나 2개에 전쟁에 대비할 만큼의 전시체제가 되어 있지 않아서 태평양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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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2월 일본의 전투력은 340만의 정규군과 300만의 예비군, 7500대의 항공기와 230척의 주력 함선을 보유하고, 지리적으로 유리한 국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미국은 훈련미필자 100만을 포함하여 150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항공기 1,157, 전투함 347, 수송선 총 1,000만 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많은 전쟁물자가 유럽방면에 투입되어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의 전쟁 목표는 연합군의 패망이 아닌 대동아공영권의 확보에 국한된 제한적 마모전이였다. 전쟁을 위해 일본은 군부의 독립된 통수권을 갖추고, 해군의 초고 통수기관 통수권이 독립되어 국무와 이원화체제가 되었는데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 통제하기위해 대본영정부연락회의를 설립하였다.


하와이의 진주만은 미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있었다. 일본은 남방자원을 확보를 위한 공격시에 일본군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대상이 하와이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였으며, 일본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는 미 함대가 공격하기 전에 선제 기습공격을 감행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의 해군본부는 남방작전에 병력을 집중해야하며, 진주만 공격에 따르는 연료보급의 난점과 기습달성의 불확실성, 만약 미 해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하더라도 일본해군이 일시에 궤멸된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야마모도의 주장이 1941년 초에 채택되어 'Z'작전이 계획되었다. 이 당시 하와이의 미군 방어 태세는 통합지휘체제가 없었으며 조기경보체제가 미흡하였고 육해군 지휘관의 실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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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일본의 제1항공함대는 나구모 중장 지휘하에 함대를 출발하고, 발각되지 않기위해 북방항로를 택하였으며 인도해역의 말라야 방면에서 기동훈련을 실시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27755분에 제1제파의 기습공격이 미 함대에 실시하여 대손실을 입히고, 825분에 종료되고, 이어서 제2파의 공격이 실시되고 945분에 모든 공격이 완료한 일본은 진주만을 이탈하여 1330분 신속히 귀항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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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기습성공 요인은 일본이 일요일을 공격일로 택하였고, 평화를 위장한 협상 기간을 이용하여 시간적인 기습을 성공시켰다. 사상 최초의 도양기습이었고, 종래의 거함거포위주의 전함은 항공모함에 의해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무전사용을 일절 금지하여 완전한 기도비닉을 달성하고 적극적인 첩보활동으로 진주만에 대한 상세한 전보를 획득하였다. 전술적으로는 태평양 재해권을 장악하였지만 전략적인 차원에서는 국민에게 전역량을 집중하여 일본타도의 길로 들어서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어 대실패를 자행하였다.


1935년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 자치정부의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다. 1941년 대일관계가 악화되자 626일 미 극동지상군을 창설하여 일본군과의 전쟁을 대비한다. 맥아더의 필리핀 방어계획은 '오렌지 3'로 루존 이외 지역에는 미군을 배치하지 않았으며 19411월부터 바탄반도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마닐라만 입구의 4개 도서도 요새화했다. 일본은 128, 루존 비행장의 중요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미 항공기를 대파시켰다. 1210, 일본의 조공부대가 아파리와 비간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1212일에는 또 하나의 조공부대가 남부 루존의 레가스피에 상륙했다. 1218일부로 루존도에 항공기지를 완료한 일본군은 즉시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 사령관 흠마(本間) 중장은 15,000명의 미군이 포함된 필리핀군 80,000명을 바탄에서 공격한다. 맥아더의 지휘하에 질서정연하게 필리핀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다내고 있었다. 흠마는 121일 서부해안 방향에 돌파구를 형성했으나 예상외의 저항에 부딪쳐 장기포위전에 돌입하였다. 세계의 이목을 끌자 흠마는 총공세를 준비했다. 맥아더의 후임 웨인라이트 중장은 49일 비탄반도에서 미군 54,000명이 항복하자 코레이도르로 철수하여 1개월간 항전을 하다 56일 함락되어 포로가 되었다. 필리핀 전역의 결과로 일본군은 전진기지를 확보했지만 차기 공격계획에 큰 차지를 빋었고 미군은 5개월이라는 시간을 얻게 되어 반격작전을 돕는 계기가 되었다.


연합군은 19423월 말, 각 국별로 전략책임 지역을 설정하여 일본과의 장기전에 대비했다. 미국은 일본군인 괌, 웨이크 등 중부태평양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서부연안-하와이-파미르-사모아 브리스베인을 연결하는 제 도서를 기지화하여 맥아더군의 병참선을 유지하고 장차 반격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아크라인을 설정, 이에 맥아더는 파푸아의 포오트모레스비를 항공기지화 하였다. 일본은 194112월 하순부터 남태평양에 대한 공세를 취하여 1942년 초 비스마르크군도의 라바울을 점령하였다. 본래 일본은 남방 자원지대의 확보를 목표로 전쟁을 개시하였는데 의외의 대성과로 본래의 계획을 변경시켜 솔로몬군도와 포오트모레스비를 점령하는 'MO'작전을 개시했다. 58일 아침, 산호해해전이 일어났는데 일본은 이 전투로 인해 포오트모레스비를 포기해야하는 전략적 패배를 한다.


1942418일 두우리틀 중령은 동경공습을 하여 일본국민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주었다. 수도 방위가 취약한 것을 인식한 일본해군은 야마모도 연합함대 사령관의 판단하에 미드웨이 섬을 공략하기로 했다. 미드웨이 섬을 장악한다면 일본본토를 방어할 수 있고 미 태평양함대를 결전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격히 무전을 통제하며 미드웨이로 향하던 일본 제1항공함대에서 공격예정일 67일의 4일전에 63일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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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로 선두함대인 아까기 뒤에 따라와야 할 가가, 히류, 소류함대가 보이지 않았다. 무전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논의를 하다가 안개가 걷히기 1시간 전에 무전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도청망을 펴놓고 기다리던 미군 함대에게 위치를 포착당하게 된다. 64630, 일본 함대기가 미드웨이 기지를 덮쳤지만 미리 대비한 미군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2차 공격을 준비하던 중, 미 항공기가 출현하여 아까기, 가가, 소류 함모는 대파되었고 65일 미 잠수함의 공격에 의해 대파되어 완전히 침몰된다. 그 결과, 일본은 동쪽으로 팽창이 저지되었고, 조지종전의 꿈은 사리지고, 태평양의 판도는 미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오키나와 전역은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주요전투였다. 오키나와 섬은 수 개의 배행장을 설치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과 입지조건이 양호한 유일한 섬이며, 양호한 정박지와 대규모 지상군이 주둔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중요한 섬이다. 일본은 우시지마 중장 지휘하에 방어계획은 미군의 상륙은 허용하되 미 함대를 특공작전으로 격퇴시킨 후 고립된 섬 안의 상륙군을 격멸하는 계획이었다. 미국은 하구시만 일대에 상륙하고 상륙과 동시에 장차작전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는 이중임무가 동시에 부여되었다. 313, 미 함재기가 규슈와 대만 일대 비행장 폭격을 시행했다. 326, 게라마 제도를 공격하여 31일 점령하였으며, 41일 새벽 1,300여 척의 대선단으로 하구시만 상륙작전 개시 18, 50,000명의 미군이 교두보를 확보하고 미나토가와 해안의 양동작전 성공으로 일본군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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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시 해군중장이 194410월 레이테 해전에서 미 제7함대에 대해 최초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사용한 이래 오키나와 전역을 위해 천호작전으로 계획된 가미가제 특공대의 활약은 46일부터 본격적으로 미 함대에 대해 실시되어 큰 피해를 입혔다. 북쪽에서는 일본군의 경미한 저항으로 416일에 대규모 비행장이 위치한 이에섬을 점령, 419일에는 대부분의 북부지역을 점령, 소탕하였다. 남쪽에서는 일본군이 벌집모양의 강력한 동국진지를 구축하여 미군의 신무기를 총동원한 공세에 무너지는 424일까지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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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으로 철수한 일본육군은 54일 야간에 역습을 했지만 최후의 공세는 실패하였다. 523일 일부 일본군의 진지가 붕괴되었고, 531일에는 전 방어선이 붕괴되었으며, 620일에는 최초의 일본군이 집단항복이 시작되었고 621일에 오키나와 전역은 종식되었다. 오키나와 전역의 결과, 일본군의 재기불능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하였고 일본 본토의 구주로 350마일 권내의 지근거리에 거대한 전진기지 획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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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46일 미 함동참모부는 종전시까지 미전략공군은 일본의 66개 도시에 100,00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일본 육군은 본토결전을 의지를 다지고 있었지만 장비가 미약했고, 훈련수준 또한 대부분 미숙했으며, 식량과 석유가 부족하여 본토 결전의 성공가능성은 희박했다. 626일 일본국왕으로부터 종전의 뜻을 만들어 소련에게 화평에 대한 알선을 의뢰했으니 무응답 상태하에 726일 미4개국에 의한 포츠담선언이 선포된다


194586815, 미군은 폴 W.티베스 대령의 지휘하에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탄을 투하한다. 기회를 노리던 소련군은 88일 일소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대일선전포고를 발하고 893개 집단군을 만주지역으로 진격시켰다. 891120, 미군은 나가사키에 제2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810,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전면 수락하고, 815일 정오에 일본 국왕의 육성방송으로 무조건 항복을 수락한다. 92일 도쿄 만내에 정박한 미조리 호 선상에서 맥아더와 일본대표 사게미쓰, 우메즈 간에 항복조인식이 거행되어 38개월 25일 만에 태평양전쟁은 종식된다.

 

일본의 패전원인은 첫 번째로, 목표의 원칙에 위배이다. 전 역량을 어느 곳, 어느 방향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를 혼돈됨 없이 규정해야하는데 일본군은 미드웨이 작전이나 레이테 작전 등에서 명확한 방향설정이 없는 애매한 전략목적을 가져 패배를 하였다. 두 번째로, 단기결전 전략의 실패이다. 일본은 미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단기결전을 지향한 일본군의 전략은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과 전력에 의해 무참히 붕괴되었다.


세 번째로, 비현실적이고 감성적인 사고이다. 일본군은 전투에 임할 시, 추상적이며 감성적인 사고로 일관함으로써 냉정하고 과학적인 사고를 기조로 한 구체적, 논리적인 전투를 경시하였다. 네 번째, 융통성이 없는 작전지휘이다. 일본군은 그들의 세부행동까지 통제받음으로써 하달된 작전방침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웅통성없이 반드시 관철되어야 했다. 시야의 협소화, 창의력의 고갈화, 사고의 경직화는 패전으로 몰고갔다.


다섯 번째, 인간관계를 중시한 명령체계이다. 개인과 조직을 중시하는 '일본식 집단주의'의 영향에 의해 중요한 의사결정시에도 인간관계 면에서의 배려 때문에 많은 경우 지연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여섯 번째, 통합 지휘체제의 불비이다. 미국은 개전과 동시에 육해군의 참모조직을 통합하는 통합참모조직을 조직하였지만, 일본은 육공군의 통합작전에 대한 준비가 전무했다.


일곱 번째, 학습을 경시한 무모한 전투행위이다. 실패에 대한 원인분석을 통한 교훈의 학습활동을 무시되었고, 무모한 전투행위를 계속함으로써 패전과 직결되었다. 여덟 번째, 창의력을 저해한 교육방법이다. '모범답안'을 기준으로 그 근사치를 유일한 평가방법으로 택하고, 일체의 변혁과 창의성, 융통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아홉 번째, 결과보다 과정 중시이다. 지휘관의 패기와 전투의지를 보고 평가했으며, 실패하더라도 과정에서 지휘관의 의지가 확고했다면 용납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사소통의 단절이다. 문제의 제기, 아이디어 창출 등에 대한 일련의 발언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결국 열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일본군은 스스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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