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이야기]제 1차 세계 대전의 역사 2부






1차 세계대전의 원인 : 사라예보 사건 ~ 7월 위기 ~ 발발


1. 시대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왕위 상속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사건은 국제적 외교위기를 야기시켰다. 정치인들은 전신을 통해서 끔찍한 소식을 빠르게 들었으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신문에서 소식들을 접했다. 새로 생겨난 엄청난 수의 신문 독자들은 즉각적이고 또한 직접적으로도 반응을 나타내었다. 대중의 분노는 이중군주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분노를 깨웠으며 대립하는 나라뿐만 아닌 자국 정부에 대해서 더욱 깊이 고려해야만 하는 모든 외교관들의 여지를 협소시켰다.


723~ 84일까지의 극적인 기간동안 5번의 최후의 통첩이 있었다. 이 통첩들은 회답 기한이 짧았으며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때에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암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도자 대부분은 반드시 신속한 대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느꼈다. 이에 대하여 독일 황제는 오스트리아가 암살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대응을 고려하고 있던 독일은 무조건 지원을 하겠다고 개인적으로 약속했다. 국가를 불문하고 군사 간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견해를 독일 황제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아직 전쟁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세르비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막는것과 더불어 영국조차 오스트리아의 신속한 행동을 찬성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영국 등 이들 모두는 빨리 세르비아를 공격하면 그걸 바탕으로 적대적 관계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화가 망가지는 데는 수많은 요인이 있지만 사건들이 오직 앞으로만 달려갔다는 것 자체도 유럽을 전쟁 속으로 빠뜨린 원인중에 하나였다.


최후통첩이 전쟁 도발로 해석된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우선 통첩의 내용이 그 가운데 하나인건 분명하다. 통첩 제 5,6항이 세르비아 내 반 오스트리아 진압과 운동의 암살자 재판에 대한 조사에 오스트리아 관료들을 참가시키라는 무리한 요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48시간이란 전례없이 짧은 회답 기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 시점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최후통첩이 예상대로 거절되면 전쟁의 확산을 막기위해서 바로 움직여야한다는 생각을 서로 하고있는 듯 했다. 같은 날 세르비아의 회답을 알지 못한 상태에 있던 러시아는 전쟁 준비 시기의 개시를 명령하였다. 러시아는 어느 열강보다 동원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에 어느정도 예비적인 준비는 해놔야만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러시아의 준비상태가 여타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 이것이 러시아가 전쟁 준비 시기를 개시한 이유였다


이러한 예방적이고 부분적인 동원은 시간과의 싸움에 있어서 외교의 요소가 되었다. 다른 국가들이 러시아가 앞서가는 모습에 점점 경계를 하며 자국의 동원계획 시간표에 가해지는 압박에 근심과 걱정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총 동원령을 가장 먼저 내린 나라는 세르비아이다 그 당시가 725일 오후3시였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에 회답을 보내야 하는 시간 3시간 전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세르비아의 회답이 무조건 수락이 아니라는 것을 예전부터 이미 알았고 세르비아의 회답에 관해 오스트리아는 즉시적인 선전포고의 필요성을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은 분쟁 조정을 위해서 시간을 들이고 있는 다른 열강들을 앞서기 위해서,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문제로 한정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즉각 전쟁을 선언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해 내린 부분 동원은 사실상 총동원 체제였고 오스트리아를 향해 가려는 러시아 부대 전체의 동원이었으며, 그에 따라서 오스트리아도 총 동원으로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내렸는데 이렇게 되면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은 독일의 총동원을 요구하고 이 사태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시작 및 경과


19147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쏜 포탄이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날, 빈과 페테르부르크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독일은 전쟁을 발칸반도에 국한시켜 볼 생각으로 러시아 제국에 대해 동원령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81일 러시아가 그 요구를 거부하자,독일 제국은 동서 양전선에서 동원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이는,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조약 의무에 따라 취해진 독일측 결정은 조약상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한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에 대적하는 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그날 오후 독일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 했다.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경우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즉각 프랑스 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러시아가 병력을 충분히 동원하기 전에 프랑스전에서 재빨리 승리를 거두려는 속셈이었다.


81일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3일 후에는 벨기에를 침공했고,프랑스로부터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지 못하자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 했다영국은 얼마나 빨리,어느 정도의 병력으로 프랑스와의 약속을 실천에 옮겨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그러나 도발하지 않은 벨기에에 대한 독일제국의 공격이 마침내 균형을 깨뜨렸다.


대영제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버해협에 면한 벨기에의 항구들이 독일군에게 함락 당한다면 전략적으로 크게 불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벨기에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대영제국의 요구를 독일이 거부하자, 84일 대영제국은 독일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6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 했고, 12일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1차 세계대전의 의미


1914년 독일이 공격 결정을 내린 데에는 선제공격을 의식하고 전략의 불균형을 알아챘을 때 그 해결방안의 하나로써 예방적 전쟁을 일으킨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행정의 발전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기자 전쟁을 일으키기 한결 쉬워졌다. 세계 전쟁에는 현대 경제에서 꾸준히 대단위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적인 능력이 필수였고, 이것은 부와 행정적 역량뿐만 아니라 집단 이데올로기와도 관련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그 전의 두 전쟁, 1, 2차 발칸 전쟁과 비슷하게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이들의 전쟁에서 보여진 야심과 극단성의 연장이기도 했다. 발칸 전쟁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은 갈등을 해결하는 주 수단이 폭력이었던 발칸 세계의 지역적 분쟁에서 시작됬다. 1차 세계대전이 이들 전쟁과 다른점은 다른 외부의 막강한 세력들이 강제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개입이 이전의 두 개의 발칸 전쟁과 1786~1877년 등 이전의 위기에서 나타난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 우리는 전쟁 직전에 있었던 일들, 특히 1912~1914년의 외교에 주의를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1871년 제 2제국의 형성으로 떠오른 독일의 간부들은 힘의 균형이 자기자신들에게 이롭게 돌아가는 한 전쟁 없이도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영국-러시아와 영국-프랑스 전쟁을 예상하며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의 오랜 제국주의적 경쟁은 유럽 평화에 기여하고 1880년대 부터는 독일에게 이익이 되었다. 독일인들이 항상 고마워하진 않았고, 러시아와 프랑스 군대가 18941차 세계대전 발발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적대적 사고 및 행동에 대한 조약을 맺었을 때 별 반응이 없었다.


대신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러시아에 어느 정도 비위를 맞췄다. 1890년대에는 영국식 자유재량권뿐만 아니라 독일실 자유재량권도 존재했다. 이것은 열강들이 하나의 동맹 체제를 묶였다거나 더 많은 행동의 자유를 갖지 않았다는 것으로는 보기 힘들다. 유럽 외부에서 일어난 갈등들 덕분에 1904~1905년경 베를린에는 영국이 결국 러시아나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이 예상은 독일 해군 계획의 실천 능력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만들었다이런 자신감은 1914년 러시아가 급속도로 강력해 질 때 즈음에 피폐해졌다.


독일이 우위를 잃을 것이라는 예상은 힘의 균형에 위협이 되었고 더 넓은 세계에선 유럽이 독일이 갖고 있던 야심을 좌절시킬 수 있는 불균형이 초래될 수 있었다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거나 상황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기 시작하면서 독일의 호전성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1910년 초 독일의 정치 및 군사 간부의 주요 인사들은 러이사의 힘이 커지고 러시아-프랑스 동맹에 둘러싸이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1912년 발칸 전쟁이 진행될 때 러시아인들은 동원령을 내렸다. 전략 철도망의 발전을 더불어 러시아 군사력이 증강되자 선제공격을 하라는 압력이 있었다. 이 철도 시스템은 러시아의 동원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특별히 계획된 프랑스의 투자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이것은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마치고 러시아에 대응하기 전에 서부에서 프랑스를 격침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줄어들게 하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러시아인들은 독일인보다 돈을 더 많이 쓰고 있었고, 독일은 회계 정책에 대한 정치적인 논쟁으로 인하여 러시아에 대응할 가능성이 없었다.


1906~1914년까지 참모총장을 맡았던 헬무트 폰 몰트케는 독일이 나중에 러시아와 전쟁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바로 전쟁을 밀어붙였다. 이런 위협감은 1차 발칸 전쟁에서 투루크가 패전하고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영국의 행동을 점치기는 어려웠지만 영국이 러시아와 공개협상을 하기로 했다는 것을 독일이 알게 되면서 더욱 고조 되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믿음은 가장 가능성 있는 순간에 전쟁을 시작하려는 욕망을 드러냈다. 독일인들은 성공적인 전쟁들을 자신 있게 뒤돌아 볼 수 있었다. 나폴레옹에 대항한 전쟁에서의 패배와 점령의 경험에 견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압박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정책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악화되는 상황에 관해서는 걱정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의 힘과 발칸에서 오스트리아가 차지하는 국제적인 위치와 발칸 점유의 안정성에 대해서 세르비아의 도전이 우려되었다. 오스트리아 간부 사이에서 외부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오스트리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데 대한 좌절감이 커지고 있었고, 거기에는 세르비아가 큰 몫을 더했다. 세르비아는 경제적으로 오스트리아에 의존했지만 1906년 불가리아와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뒤바뀌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1908년에 합병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슬라브족의 야망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했다.


세르비아인들은 그들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발칸 전쟁 중에 현실적이지 못한 몇가지 계획을 포함한 자신들의 목적조차 이룰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독일이 아주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게다가 무력함에 대한 불안감은 정치에서도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지도층은 점점 헝가리와 관계를 좌우하지 못했으며 슬로베니아인들부터 체코인들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집단들이 의회의 의사진행을 자주 방해하고, 그때까지도 권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있는 귀족들은 편하지 못했다. 게다가 군대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떄문에 군대를 제어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 베케는 참모총장이 아니었다. 사라예보에서 암살이 있기 전에 오스트리아 지도층은 점점 베를린에서 동의한다면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국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의 일부인 트란실바니아에 살고 있는 루마니아인들에 대한 이익을 러시아가 지지하고 나선 것도 불안을 고조시켰다.


이와 반대로 러시아인들은 세르비아의 성공에 힘입어 세르비아를 보호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1912년 발칸 내 반투루크, 반오스트리아 연맹의 결성을 재촉했고 세르비아의 니콜라 파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러시아는 또 투루크에 대한 독일의 힘이 커지는 것을 반대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에 대한 암살 직후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위협은 동유럽 내 러시아 국제 관계에 대한 인식에 대하 도적으로 생각되었다. 암살을 저지른 테러리스트들은 세르비아 정부가 아닌 남부 슬라브 지역에 대한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정복하려고 결사한 세르비아의 비밀 조직인 블랙핸드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러시아와의 협약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는 여전히 확실했고, 프랑스는 영-러 관계를 개선시키고 프랑스 군대의 규모를 증대시킴으로써 러시아와 관계를 한층 더 강화하려고 했다실제로 프랑스 대통령이 세르비아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를 분명히 했다.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난 까닭에는 우연이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후반 식민지를 놓고 프랑스와 영국, 영국과 러시아가 긴장을 고조시키던 때와는 다르게 큰 규모로 일어난 유럽에서의 전쟁이었다. 러시아는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세력이 약해졌고 프랑스는 독일의 외교적 압력을 받게 되었으며 영국은 1905~19061차 모로코 위기에서 보인 것과 같은 독일의 의도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독일에 의해 시작된 위기 이후 독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참모회의가 열렸다.


그 결과는 영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1907년 프랑스가 아닌 독일을 적국으로 정한 영국의 군사작전이 처음으로 실행되었다. 그 해 독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러 협약이 체결되었지만 항상 마찬가지로 정치적 의견은 달랐다. 정치계와 관계에서는 독일에 대해 적대심을 갖고 있었으나 동시에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하는 정치인들도 없지않아 있었다. 게다가 협약은 동맹이 아니었다.


1914년 위기를 경쟁상태에 대한 관심으로만 본다면 잘못된 시선일 것이다. 불신과 전쟁 위기가 초래해 온 것은 많은 부분 문화 및 이데올로기적 요인에 기여한 것이었다. 1870년 대부터 시작된 다윈주의와 자연스런 경쟁에 대한 강요로 인해 본성을 보일 수 밖에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때늦은 낭만주의는 고통을 통해 순수와 정체성을 찾으려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전쟁과 투쟁을 찬양하였다. 수준높은 교육을 받는 계층은 전쟁의 도덕적 가치를 수긍하고 민족주의의 역할은 국가간에 전쟁이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돋궜다.


이런 문화적 가설로 갈등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차이가 더욱 심해지는 데에는 일조했다따라서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사라예보 암살을 행한 테러리스트들에게는 폭력적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해 보였다. 암살소식이 비엔나에 전해지고 갑작스러운 사건에 대한 반응과 경악은 세르비아와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견을 보였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인들은 입장을 바꾸어 독일의 지지 약속을 받아들였다. 독일의 가까운 동맹국이 되겠다는 바램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강력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으며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반영하기도 했다. 그 결과 독일은 스스로 예정표나 변수를 조정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 독일의 후원은 오스트리아의 무력 지지자들이 헝가리의 정치가인 이슈트반 티사의 반대를 잠재웠다. 이로써 국제적 상황이 오스트리아 내부의 정치 분쟁에 영향을 끼쳐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제국의 힘을 버티게 했다.


오스트리아 인들은 국지전이 가능할 것이며, 정해진 날짜에 약속된 독일의 후원으로 러시아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게 될 것이고, 국내 및 국제 상황이 세르비아와 전쟁에 알맞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7월 말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세르비아 정부가 이를 거절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에 대한 세르비아의 답변에서는 많은 요구를 수락했지만 경찰 조사는 거부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세르비아의 답변이 적절하지 않다고 거부했고 며칠 후 바로 전쟁을 선포하고 그 날 밤 전투를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이 최후통첩에 대해 군사적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의 후원을 믿고 있었고 확실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발칸전쟁 도중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점에 동의했으나 19147월 러시아는 싸울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존심 상할정도로 약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준비 태세는 부분 동원으로 이어졌고, 이로써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그리고 독일에서는 위기가 고조되어 군사적 행동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다. 위기를 저지하고 갈등을 지역에 국한시키려는 노력은 단계적 확대를 거치면서 모두 망했다.


러시아의 동원령은 독일에 압박을 주었다. 독일의 전쟁 계획은 러시아가 행동을 하기전에 프랑스에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모두 준비 태새를 풀지 않자, 물러서고 싶지 않던 독일 정부는 자국의 전략에 따라 공격을 했다. 총동원령은 8월에 내려졌다.


동원령은 전쟁의 의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군사적 고려와 군 간부층이 정부를 움직이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군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서 굉장히 중요했다. 오스트리아의 참모총장 콘라드 폰 호첸도르프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원했다. 그는 전쟁이 필요하다 느끼게 되었다.


이전의 위기에서는 위기 인식이 전쟁으로 이어지는걸 방지 해주었지만 1914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택하고 독일에게 지원을 받았으며 러시아가 이에 대응했기 때문에 상황이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신중히 전쟁을 선택했고, 러시아는 이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발칸 지역에서의 영향력과 앞으로 예상하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을 거라는 판단하에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의 행동은 특히 발칸인들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좌절감을 보여줬다. 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 내부의 민족주의가 이미 공격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대영제국 내의 아일랜드나 인도의 민족주의와는 다르게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는 민족주의는 막강한 타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슈트반 티사가 1914년 지원활동을 거부한 것은 전쟁이나 의사 결정자들의 견해를 납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른 나라의 지도층과 다를 것 없이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주의하기 보단 행동을 촉구했다. 독일 지도자들은 발칸 위기를 이용하여 국제적인 힘의 균형을 독일에 유리하게 적용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들은 주요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참가와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보장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줄 만한 다른 위기가 없었기 때문에 사라예보 사태로 인해 일어난 전쟁을 감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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