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1917년,미국이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918년 중순,동맹국들은 힘이 소진된다.결국, 1918년9월30일에는 불가리아가 처음으로 연합국에 항복하였다.불가리아가 항복한 지 한 달 후에는 오스만 제국도 항복하였으며,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항복하였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독일에서는 수병 반란이 일어났다.며칠이 지나자 독일 전체에서 노동자들 또한 군수품 생산에 지쳤다면서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그 다음에는 베를린에서 친위대들과 실랑이를 벌였고, 11월9일에는 황제인 빌헬름2세가 퇴위하였다.
황제는11월10일,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같은 날,독일에서는 공화국 정부가 세워졌다. 1918년11월11일 아침,독일 제국도 연합국에게 항복하였다.이렇게 해서 약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 이후의 세계 정세
영국,미국,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일본은 오세아니아의 작은 섬들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한편,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반성보다 지독한 가난과 연합국에 대한 보복에 시달렸으며 오스만 제국도 세브르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영토로 고정되었고,헝가리도 트리아농 조약으로 현재의 영토를 확정했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그 이후에 많은 실직자가 생겨났고,패전국인 독일에서는 감자 하나에 수십억 마르크로 값이 치솟았다.중화민국은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연합국들은 패전국들의 식민지 일부를 프랑스는 레바논,시리아,기타 독일의 식민지(카메룬)등을 차지했으며 영국 또한 요르단과 잔지바르 지역을 차지하였다.타이는 입헌 군주국으로 발전하고,중동 지역에도 오스만 제국과 싸운 대가로 독립을 성취하였다. (이라크,이란,사우디아라비아,아프가니스탄,북예멘 등을 꼽을 수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동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독립하였으며,한국에서도 그것의 영향을 받아3·1운동이 일어났다.독립을 조건으로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그 약속이 무산되자 지속적인 투쟁 운동을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1922년에 해체되어1923년에는 지금의 터키로 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후 세계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14개조 원칙이 담긴 파리 평화회의를 비롯해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고,각 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 확산과 평화를 위한 노력이 강행되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데,러시아 혁명,중국의 민족운동,우리나라의3.1운동과 같은 사건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이 전쟁으로 특히,많은 이익을 얻은 국가가 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의 선반까지 공격하게 되어서 미국이 참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을 비롯하여,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5개국을 바탕으로 전쟁 후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렸는데, 1918년1월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은 회의에 보낸 교과서에서14개조의 전후 세계 평화안을 발표하였다.
이 내용은 파리 회의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원칙으로 제시되었다.그 내용은 앞으로 전쟁을 방지하고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원칙으로서 비밀 외교의 철폐,공해상에서의 자유,경제 장벽의 제거,군비 축소,민족 자결주의,식민지 문제의 조정,국제 연맹의 창설 등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이는 전쟁을 중지하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그 동안 각 국이 추진하여 왔던 제국주의 정책을 전쟁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세계 평화를 이룩하자는 이상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 전승국들은 전쟁 피해 보상 문제 등 현실적인 이해 문제에 치중하였으며,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에게 돌리면서 독일로부터 막대한 전쟁 보상을 요구하여,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는데,파리 회담은 패전국에 대한 가혹적인 처벌이었고,그것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국제 정치라는 것이 이제는 유럽에만 힘을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전 세계가 국제 정치의 무대가 되었으며,국제정치가 좁은 유럽에서 벗어나 전세계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 세계 국민의 감시 속에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전 세계 지도자들이 가지게 되었다.특히,도덕적으로 국제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1. 사상자
구분 | 연합국 측 | 패전국 측 | 비고 |
전사자 | 5,000,000명 | 4,000,000명 | 전투병력 민간인 포함 (미군:116,708명) |
참전 국가 중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프랑스의 사상자가 많았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군기는 왕성하였으나 민족 문제 때문에 패배하곤 했다.
2. 기술
제1차 세계 대전 중,과학 기술은 독가스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냈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연합군측도 곧 비슷한 종류의 독가스로 대응했다.독가스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양측 모두 방독면 외에는 없었다.독가스가 사용된 것은1914년1차 마른 전투 이후 기관총,철조망,참호선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서였다. 탱크도 이 참호선을 뚫기 위해 개발되었으며,대포들도 점점 대구 경화되었다.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도 등장하였다.
전쟁의 교훈
영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Great War1) 라고 부른다. 그만큼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은 무엇보다 희생자가 굉장히 크다. 무려 32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각종 무기, 전차등이 나왔고 국가 총력 지원 체제와 대전략의 등장 등 과거에 경험해볼 수 없었던 단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차 대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점이다.
단 한 대의 기관총이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대오를 지켜가며 꼿꼿히 서서 돌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당시 군 지휘부였던 귀족들은 옷에 흙을 묻히고 싶지 않았다. 1차 대전 당시 새로운 환경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환경 변화의 내용과 유사하다 혁신적인 신기술의 등장, 기존 권위의 붕괴 그리고 수평적 문화 확산, 생산수단으로써가 아닌 목적으로써의 인간의 재발견 등은 1차 세계대전과 현재 상황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다.
환경 변화의 폭과 강도가 엄청나고 불확실성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카를 폰 클라우세비츠는 fog of war 라는 표현을 썼다.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의 가정이나 계획과 달리 항상 새로운 상황이 연출된다라는 뜻이다. 넓은 시야를 갖고 변화의 본성을 파악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갖춰나가는 것은 전쟁 지휘관이나 우리 모두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1) 1차 세계대전이‘Great war’인 이유 : 1차 세계 대전은 지구상 유래 없는 대전 이였다.과거 전쟁 방식에서 벗어나 기관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인해 전쟁양상이 전술형태가 달랐으며 독가스의 개발 등 현대적인살상 무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고 참전 국가 또한 많다.이러한 이유로1차 세계 대전을‘Great war’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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