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 대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 4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 및 배경
1. 정치적 배경
정치적 측면에 대해 살펴보면, 가장 뚜렷하게 돋보이는 것은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자리를 잡았지만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보여졌다. 그것은 바로 대세르비아 플랜, 프랑스의 보복운동, 러시아의 범슬라브 운동, 마지막으로 범독일 운동이었다.
오스트리아가 1900년대초 보스니아가 헤르체고비나를 졸지에 합병하자 대세르비아 계획은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는 쪽으로 방법을 대신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들을 선동하여 세르비아로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결국 이중왕국에 반대하는 음모들이 일어나서 1914년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자를 암살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벌거벗은 세계사 22회 |
범슬라브운동은 동유럽의 모든 슬라브족들은 한 가족이라는 것에 빗대고 있었다. 범슬라브주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들의 애상적인 희망이고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경찰이다. 이 중에서 러시아는 가장 강대한 슬라브국가였고 발칸의 여려 민족들의 빛이 되었다. 프랑스의 보복운동은 1870년 프랑스ㆍ프로이센 전쟁의 패전을 보복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다수의 의견은 아니었고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강한 반발과 반감을 사기도 했다. 범독일 운동은 1800년대 말 창설된 범독일동맹의 이념에서 유래하였고 중앙유럽의 모든 튜턴족들을 포괄하는 독일의 팽창을 슬로건으로 하여 독일제국의 위성제국을 주장하였다.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승전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는 3제동맹을 1873년에 결성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터키의 영토문제로 오스트리아ㆍ독일과의 불편한 관계를 가지면서 3제동맹이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를 재가입시키면서 3국동맹으 1882년에 결성했다. 그러나 유럽은 비스마르크의 업적을 허물어뜨리는 외교적인 변화를 맞게된다. 비스마르크가 은퇴한 사실과 러시아의 범슬라브 주의로 오스트리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또한 프랑스와 러시아의 재정적 결속으로
정치적 동맹의 길이 열린 것은 바로 이런 외교적 변화를 가져온 원인이다. 그리고 영국이 고립정책을 취소하고 이탈리아가 3국동맹을 이탈함으로써 비스마르크의 고립정책은 변화를 맞이하였다.
외교적 변화의 결과는 3국협상의 결성이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2중동맹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협상을 도출해냈고 마지막 단계로 영국과 러시아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1900년 초 경 유럽의 강대국들은 3국동맹과 3국협상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3국동맹은 이탈리아의 이탈로 약화되었으며, 3국협상도 초기에는 잘 발달하는 듯 싶었으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에 대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간의 분쟁으로 틈이 벌어졌다. 게다가 영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협력하여 세르비아로 하여금 알바니아를 포기하도록 한 것과 강대국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고자 한 영국의 외교정책으로 말미암아 3국협상도 그에 갈 길을 잃어버렸다.
2. 경제적 배경
1871년부터 본격화된 국가들 사이의 산업·상업 반목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14년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의 독일은 영국의 경제를 따라 잡아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고,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본래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라이벌로,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자원과 무역 기회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산지인 로렌이 망하자 독일의 산업만이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에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어서 이 지역을 일찌감치 탐내왔던 러시아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부설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 철도의 부설은 보스포러스(Bosporus)에서 티그리스 강의 바그다드까지 이루는 노선으로, 이것은 다시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고 있어 인도에까지 가는 단축노선을 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자본투자에 의해 실시하려 하였으나 양국 간 각각의 이해관계에는 맞지 않아 거절하였고, 독일은 375마일 철도선을 강행하여 국제적 반목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3. 외교적 배경
외교적 측면에 대해 살펴보자면 1905년부터 1913년 사이에 일어난 국제적 위기 사건들이 있었다. 모로코 위기는 독일과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발생되었다. 1880년 마드리드회의에서 모로코의 경제적 특권은 모든 국가 대표자들에 의해 동등하게 공유다고 규정했지만 프랑스는 이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모로코의 독점을 원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1904년에 영국과 협정을 맺었고 그 술탄지역에 새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드디어 모로코는 분리되었으며 지브롤터 반대편의 작은 부분의 스페인에게 그리고 남은 부분은 프랑스가 가져갔다. 독일은 1905년에 이 협정에 속임수가 있음을 눈치 챘고 프랑스가 모로코의 권리를 포기하던지 혹은 보상을 지불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제 1908년 2차 위기와 1911년 3차 위기가 독일의 모로코 주장으로부터 야기되었는데 결국 1911년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프랑스령 콩고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타협을 보았다.
발칸전쟁과 보스니아 문제를 일으킨 근동의 위기는 모로코의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오스트리아는 1908년 10월 터키령인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함으로써 베를린조약을 어겼다. 이에대하여 분노한 세르비아 국민들이 러시아에게 호소했으며,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게 경고를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에 관한 여론도 긍정적이지는 못했다. 보스니아 위기는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일으킨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감정은 발칸전쟁에 의해 더욱 약화되었다. 제 1차 전쟁은 케말 파샤가 이끄는 청년 터키당의 오토만화계획의 결과로 일어났다.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는 그리스의 후원을 받아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기 위해서 발칸동맹을 결성했다. 전쟁은 1912년 가을에 시작되었으며 두 달도 안되 터키는 흩어지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증강을 두려워한 나머지 프랑스, 영국의 지지로 알바니아의 독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에서의 반오스트리아 감정은 나날이 심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세르비아 왕국도 그 동맹국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외교적인 위기를 전쟁으로 몰고 갈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분할한 폴란드, 우크라이나 영토를 누가 더 많이 자국의 세력권 안에 넣느냐 하는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도 영토를 넓히려 하고 있었다. 또한, 흑해와 에개해를 잇는 중요한 수로인 다다넬즈 해협과 함께 전략적 요충지인 반도를 직접 통치하거나 아니면 자국의 영향권 안에 두고 싶어했다.
러시아 제국은 러일전쟁의 참패로 군사력이 약화된 터라 개입은 하지 못했었다.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러시아는 전략적인 이득 추구, 범슬라브 운동에 대한 동정, 숙적을 골탕먹이고 싶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미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로 부터 비슷한 지원을 다짐받고 있었다. 유럽의 통치자로서 자국의 무력에 대해 빌헬름 2세만큼 큰소리를 치는 군주는 없었다. 그는 독일제국이 완전히 지배하는 중부유럽을 꿈꾸고 있었다. 독일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국제적인 인정을 하루 빨리 받아내고 싶은 나머지, 그는 필요하다면 외국에서의 자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칼을 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있었다. 인구는 25%, 자본력은 50%, 국민소득은 100% 늘어났다. 강철 생산량은 대영제국의 3배, 프랑스나 러시아의 4배가 되었다. 민족적 자신감이 팽배해진 독일제국은 대영제국을 넘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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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보불전쟁에서 알사스와 로렌 지방을 빼앗긴 프랑스는 인구가 독일 인구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며 공업력, 군사력에서 점점 낙후해 가고 있었다. 이 세력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1892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맺었는데 독일이 군대동원령을 내리면 두 나라가 같이 동원령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독일인들이 자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영국은 독일이 해군력의 경쟁을 촉발하자 두려움을 갖고 대비하게 되었다. 사실, 영국은 섬나라여서 식량과 원자재 공급을 자국 선박의 해상로 확보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해상로 확보와 유지는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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