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도 회사의 설립
17세기 초 서양세력이 동양에 대한 독점무역을 경영하기 위하여 동인도에 설립한 무역독점회사인 동인도회사는 우리에게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 경영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있다. 하지만 동인도 회사가 영국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인도 회사의 출발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식민지 경쟁에 있어서 영국은 네덜란드, 포르투갈에 뒤쳐진 후발 주자였다.
동인도 회사는 영국에서 가장먼저 설립되지만 그 운영방식과 구조가 미흡했기 때문에 17세기 초반에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더욱 우세한 모습을 보인다. 동인도 회사들은 은괴를 아시아지역으로 보내어 여러 진귀한 물품을 사들이는 무역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그 물품들은 주로 후추나 스파이스 같은 향신료와 아시아산 직물, 차, 도자기 등이 있었다.
동인도 회사의 역사 -1
1. 영국 동인도회사의 시작
1600년 12월 31일, 영국 동인도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법인으로 인정되었다. 2달 뒤, 처음으로 동인도회사의 선박이 영국으로 떠났으며 이들은 후추를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와 큰 이익을 남기게 된다. 이때부터 런던의 동인도회사의 상인들은 유럽 각지로 재수출을 개척함으로써 무역을 발전시켰다. 초기의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한번 항해마다 자금을 모으고, 배가 귀국하여 이득이 나면 그 이득을 투자금에 비례해서 분배하는 ‘개별항해’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라이벌이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경쟁하기 어려웠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여러 동인도회사들을 하나의 기업으로써 통합하여 주식회사로써 운영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613년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는 합본회사의 방식으로 운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657년 크롬웰의 개편에 의하여 영국 동인도회사도 영속적인 회사조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2. 영국 - 네덜란드 전쟁
17세기 중~후반에 걸쳐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는 세 번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들은 해상에서만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누 나라사이의 갈등은 동인도의 후추거래로 인한 것이었으므로, 경제전쟁 또는 상업전쟁으로 표현할 수 있다. 1차 전쟁은 청교도 혁명 때에 크롬웰이 공포한 항해조례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2차 전쟁 또한 찰스 2세가 항해조례를 선포하면서 발발하였다.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통해 북미식민지(뉴욕)를 얻고, 노예무역에 참가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상업과 무역이 해적행위나 해전과 불가분하게 연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7세기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그것이 국가 간의 전쟁으로 까지 확대된 것이었다. 이것은 최초의 중상주의적 상업전쟁, 해상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영국과 캘리코
17세기 초,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할 당시 그들의 목적 중에는 영국산 모직물을 세계시장에 내다 팔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세계시장에 나가보니 모직물은 그다지 경쟁력이 없었고 그들은 아시아의 값진 물품을 들여와 유럽시장에 재 수출하는 무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후추와 스파이스 같은 향신료를 독점하기 위하여 주변국의 동인도회사와 경쟁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전반 후추와 스파이스의 무역에 있어서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더 컸다. 영국은 동인도에서 들여오는 화물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서 인도산 목면(캘리코)을 유럽으로 들여오기 시작하였다.
목면은 인도가 원산지로 중국과 아시아 각지로 퍼져있었다. 그리고 아프리카나 신대륙 원주민들에게도 목면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서유럽에만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목면은 아랍을 통해 지중해로 전해졌으며 15세기에 베네치아의 배가 목면사를 구하기 위해 아랍으로 간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수입한 목면사를 아마와 섞어 짜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100% 순면은 영국동인도회사와 함께 17세기에야 유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캘리코는 1670-80년대 붐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는다. 영국인들은 이전에 수입해 쓰고 있던 린넨(아마)의 대용으로써 캘리코에 열광하였다. 왜냐하면 캘리코는 린넨보다 우수하면서도 그 가격은 1/3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모직물 생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외의 직물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캘리코의 수입과 폭발적인 인기는 영국내의 모직물 공업 보다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연방의 린넨 산업에 더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캘리코는 가격의 경쟁력이 좋았기 때문에 매우 빠른 속도로 일반 대중에게 가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1680-90년대에 걸쳐 캘리코의 무역에 대해 비판이 가해지면서
‘캘리코 수입금지법(1700년)’이 생겼다.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드디어 사용금지법까지 생기게 되었다.
4. 18세기 - 차 수입의 증가
17세기 전반에는 후추와 스파이스가 수입품의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부터는 이들의 비율이 떨어지고 목면과 견직류의 비율이 늘어났다. 18세기가 되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직물류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후추는 7% 이하를 나타내었다. 또한 18세기에는 차와 커피의 수입이 크게 증가하였다.
차는 17세기말에는 1%가 채 되지 않았으나 1720년 무렵에는 10%,. 1750년에는 20%, 1760년에는 40% 이상을 차지하였다. 또 커피도 17세기에는 1~2%였으나, 1724년에는 22%까지 증가한다. 이러한 경향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은 아시아로부터 각양각색의 물품을 구입하였지만 아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아시아인들에게 구매능력이 약했던 것도 그 이유이지만, 공업화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아시아 쪽이 물자가 더 풍부하고 다양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아시아에 광폭 모직물, 얇은 모직물, 산호, 동, 철, 상아, 아연, 수은, 주석, 금, 은 등을 주로 수출하였고 아시아로부터 도자기, 커피, 인디고, 후추, 명반, 원견, 봄베이산 직물, 마르다스산 직물, 벵골산 직물, 중국산 직물 등과 빙차, 헤이슨차, 싱글로차, 페코차, 스티온차, 공구차(중국산), 보헤어차(중국산) 등을 수입하였다.
18세기 초반, 아메리카 대륙과의 무역을 위한 남해회사가 설립되고 그와 관련한 각종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된다. 이와 같은 버블 현상은 곧 주식문제를 야기시켜 공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이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남해공황에 따라서 국제적인 신용위기가 닥치면서 금과 은의 품귀현상이 일어났고 금융위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해공황에 따른 금융위기는 금방 수습이 되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관세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보호관세제도’가 생겨나면서 ‘보세창고제도’도 만들어졌다. 이것의 대상은 대부분의 수입상품이었고 특히 차, 커피, 설탕, 담배, 섬유제품 등에 높게 부과되었다. 수입품의 관세수입은 국고 수입의 약 1/4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수입관세는 오늘날의 소비세와 비슷한 개념이다.
5. 중국무역과 차
영국의 차 수입은 1720년경부터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정식수입양만을 나타낸 것으로 밀수된 차의 양까지 생각한다면 매우 많았을 것이다. 1784년 감면법으로 차의 가격이 지금까지의 1/2로 떨어지면서 1인당 차 소비량이 종래의 2배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렇게 대량의 차가 동인도회사로 수입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과 중국 간의 직거래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까지의 차 무역은 중국의 배가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에 가지고 온 물건 중 일부를 영국이 사들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697년 영국의 선박이 중국의 하문에 도착하여 직접 차를 수입하였고, 청의 공식 무역항이던 광동과의 교류가 시작된 것은 1704년 무렵이다. 1713년에는 정식으로 광동에 접근할 권리를 얻었다.
1717년부터 영국 동인도 회사는 광동에서 중국 차 선적을 정기적으로 행하였고 이후 차의 수입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부터 차 수입이 견직물 수입을 추월하여 우위를 차지하였고 18세기 후반에는 차가 중국무역의 80%이상을 차지하면서 주요 품목이 된다. 영국 가정들은 차를 사는 데에 해마다 평균 수입의 10%정도를 썼다. 이와 같이 모든 계층에 차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면서 차에 매겨진 관세수입도 증가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왕실의 특허장을 받으면서 런던시장에 안정적은 차를 공급하겠다고 중국에 약속하였고 또한 차의 품질을 매우 까다롭게 구분하였다. 1816년의 경매시장에서는 무려 21개의 등급으로 차를 구분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감정하여 최고 등급으로 인정받은 차는 국제시장에서도 최고의 품질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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