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도 회사의 역사 -2
6. 도자기 무역
중국의 도자기는 유럽에서 사치품으로써 부자들이 수집하는 품목이 되었다. 영국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중국 도자기 수입광이었다고 전해진다. 메리여왕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자기로 방을 꾸몄고, 루이 14세는 도자기 전용 방을 따로 마련했다. 또 그는 중국에 직접 프랑스 위장을 그린 도자기를 대량주문하기도 했다. 유럽 상류층의 귀족들은 황실을 따라 자기 가문의 문양이 들어간 도자기를 주문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도자기의 수입이 많아지면서 18세기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중국 도자기를 쓸 정도로 필수품으로 시장이 확산되었다.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에 공급에 있어서도 각국의 동인도회사들은 경쟁해야만 했다. 또한 도자기는 종류도 다양하고 모양이나 질량, 규격 등에도 큰 차이가 있어서 구매 시에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유럽의 전문가를 중국으로 보내어 도자기를 감식하고 구매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차와 함께 도자기 무역이 활황을 보이면서 중국에는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되게 된다. 아편전쟁 전까지 영국이 중국에 지불한 백은은 약 6,250만 냥이다. 중국에서 유통되는 은의 60~70%가 외국 선박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산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영국 상선이 지불한 은의 양은 매우 많은 것이었다.
7. 동인도회사 - 식민지 지배자
동인도회사는 무역회사로써 형성되었고, 동인도 무역을 통해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동인도회사가 인도지역에서 독점적인 무역회사로써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식민지 지배의 도구가 되어갔다.
1757년 플라시 전투(벵골지방)를 계기로 인도에 대한 영국의 영토지배가 사실상 시작되었다. 이전가지 상업적인 진출만이 있었자면 이제는 영토적, 행적적인 진출도 이루어졌다. 동인도회사는 이때까지는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정치가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는 디와니(징세, 재정담당 장관의 권한)을 얻게 되었고 벵골, 비할, 오리사의 토지세 수입을 손에 넣었다.
이것은 동인도회사가 정치, 행정적 지배와는 관계없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벵골 통치의 완전한 권한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인도법의 제정을 통하여 영국 정부가 인도 주재 고위직의 임명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동인도회사의 사업을 감시하는 정부기관을 설치하게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정부의 감시하게 놓이게 되면서 정부의 식민지 지배의 운영도구로써 움직이게 되었다. 영국의 사람들이 인도로 이주하여 지주로써 성장하였고, 엄청난 부를 손에 거머쥐었다. 인도 거주 영국인을 나타내는 ‘네이봅’이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네이봅들은 나태한 이미지로 각인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네이봅들은 인도에서 말도 안될 정도의 부자로 성장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국에서 은을 들여와서 인도에서 면직물을 사거나 중국에서 차를 사는 무역패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플라시 전투이후 영국 동인도회사가 디와니를 획득한 결과, 인도 내에서 협박과 약탈을 통하여 싼가격에 인도의 물건을 유출하여 유럽으로 팔아넘기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세포이’가 출현하게 된다. 세포이는 인도인 용병으로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병사들이었다(동인도회사軍). 세포이에는 높은 계급 출신이 많아서 예의도 바르고 유능하여 고용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었고 이들은 동인도회사의 지배영역 확대를 위하여 싸웠다. 1857년 20만 대군으로 증가해있던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세포이의 항쟁).
8. 인도무역의 독점 폐지
산업혁명을 계기로 영국 면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전의 인도면직업을 파멸시켰다. 이것은 결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시장이 영국의 면공업자본가에게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8세기 이후 인도로부터의 수입무역은 동인도회사가 독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인도에 대한 수출무역까지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상인들과 제조업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1813년에 인도 무역이 전면 개방되게 된다. 이것은 정확히 인도 뿐만 아니라 ‘중국 황제의 지배 영역을 제외한’ 동인도회사의 모든 무역지역 및 항구에서 무역하거나 거래하거나 투기하는 권리를 모두 공개 할 것을 규정한다. 이 결과 인도 각지에서는 개인무역 상인들이 잇달아 무역회사를 만들어서 중국무역 개방에 대비한 발판을 만들고 있었다.
9. 중국 무역의 개방
인도 무역의 전면 개방을 계기로 개인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무역업에 진출한 배경에는 중국무역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으로의 인도산 아편 판매였다. 아편 밀수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고 중국으로부터 차 수입을 하는 대가로 크게 확대된 것은 1784년 이후이다. 19세기에 들어서 아편무역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물론 개인 상인 뿐만 아니라 동인도 회사도 아편무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중국으로의 차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고 있던 동인도 회사는 1773년에 인도에서의 아편 전매권을 얻고 아편 제조 독점권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인도에서 만든 아편을 중국으로 판매하면서 인도 주재 개인 무역 상인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인 상인들은 중국에 대한 무역을 개방하라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아편 상인들만이 중국개방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영국의 목면공업자들은 동인도회사 독점에 반대하여 1827년 중국무역 개방을 요구하는 청원을 하원에 제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동인도회사의 중국무역 독점 폐지와 전면개방을 요구하는 결의를 하였다.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상업자본가와 본국 상업자본가로부터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결국 1833년 중국의 차 무역에 대한 동인도 회사의 독점권은 폐지되었다.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권 폐지 이후, 인도에서 동인도회사를 이용한 정치적 점령이 확대된 것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동인도회사는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자유항을 건설하였다. 이때부터 싱가포르는 영국의 중국진출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또한 1840년 아편전쟁을 벌이면서 홍콩을 점령하고 자유항으로 선포함으로써 영국의 개인무역 상인들이 토지를 사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홍콩은 이렇게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10. 영국 동인도회사의 해산
앞서 언급하였던 인도의 세포이 반란은 이후 인도내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857년 세포이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배급되는 새 약포에 소와 돼지의 기름이 칠해져 있고, 이것을 깨물면 힌두교와 이슬람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것이 세포이들의 봉기가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세포이들의 봉기로 인해 무굴제국의 황제는 영국에게 잃었던 통치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고, 반란군은 무굴제국의 행정의회를 만들었다.
이후 영국군의 공격으로 황제는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으나, 황제가 없이도 인도 전역으로 퍼진 봉기는 1년 이상 지속되었고 동인도회사는 영국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영국 정부는 이 무렵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으므로 요구한 것보다 많은 수의 대군을 인도에 보내었다. 하지만 세포이의 항쟁이 진압된 것은 한참이 더 지난 이후의 일이었다. 이 사이에 동인도 회사는 해산되게 된다. 해산의 이유는 인도 반란의 책임을 물은 것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미 상업적 독점권을 잃어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해산될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로부터 식민지에 대한 통치권을 박탈하는 ‘인도통치법’이 1858년 가결되었고 동인도회사는 완전히 그 명맥이 끊기게 된다. 이후 인도는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에 놓이게 되었고 인도 시장은 영국의 면직업 자본가들에게 점령되게 된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무역 독점권과 인도 지배권을 잃으면서 해산하는 과정에서 개인 자유 무역 상인들이 아시아로 바르게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1858년 동인도 회사가 해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력이 끊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동인도회사의 영향을 받은 개인 상인들은 해산 이후에도 홍콩 등을 거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자딘 마테슨사로, 중국에서는 이화양행으로 불리었다. 아편전쟁 이후 본사를 홍콩으로 하고 중국대륙으로 진출했다. 광동과 상하이에 지점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말이 되면서 조선, 운수, 창고, 제사(製絲), 부동산 등의 사업에도 영역을 넓혔다. 청에 대해 차관도 제공했으며 경봉철도와 같은 철도건설에도 관여함으로써 영국의 중국제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에도 참가하였다. 2차대전 이후 중국에서 후퇴하였지만 1980년대 이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회사는 현재에도 홍콩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동남아시아, 태평양각지, 남아프리카, 중동 등에도 진출하여 무역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 문헌
1. 리궈룽, 『제국의 상점』, (서울:소나무, 2008)
2. 아사다 미노루, 『동인도회사』(서울:파피에, 2004)
3. CCTV 다큐멘터리 대국굴기 제작진, 『대국굴기, 강대국의 조건』,(서울:ag,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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